알피 리 (Alfie Lee, 1993년생) 작가님은 1인 출판사 'Bits'를 운영하며, 2019년부터 동시대 여성들의 호흡을 담아낸 만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출판 지원 사업에 선정된 <Ur own XXX>가 있으며, 이 작품은 지난 5월 일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주요 경력으로는 <피의 계약자> 웹툰, 일러스트레이터 밀새와의 협업 웹툰(Studio AM 명의), <탈혼기> 코미컬라이즈 작업 등이 있습니다. 부천작가로 선정되어 바르셀로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은 작가의 예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다양한 국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사회적 트라우마와 페미니즘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고, 바르셀로나의 문화적 다양성과 풍부한 예술적 유산은 작품 세계에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현재는 해당 도시의 인문학적 가치를 반영한 단편집을 발간 계획입니다.
1. 바르셀로나 레지던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 무엇이었나요? 그 경험이 작가님의 작품 세계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설명해 주세요.
당연히 같은 시기에 레지던시에 초대 받았던 다른 예술가들과 연결되는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슬로베니아에서 온 시모나 해머 작가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슬로베니아는 91년부터 10년동안 6국가가 함께 겪었던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트라우마가 아직 존재하는 곳이고 시모나는 페미니즘, 사회의 역기능, 문화적 맥락을 주 소재로 작업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가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트라우마를 말하는 것과 그것을 작업으로 승화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이야기 할 수 있었어요. 놀랍게도 너무 비슷한 사회적 현상 ( 1세대가 트라우마에 대해 함구하고 2-3세대가 그나마 이야기 하기 시작하는 것) 들을 겪었다는 걸 공유할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문화적 변방에 있는 국가에서 성장한 예술가들의 정체성에 어떤 경험이 개입하는지 솔직한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물론 슬로베니아의 경우 서유럽 국가와 훨씬 가까운 거리를 기반으로 한 문화적 교류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어로 번역된 슬로베니아 작가의 책도 서점이나 축제에서 많이 볼 수 있었으니까요. 작품세계에 대한 반영은.. 지금 작업하고 있는 시나리오에서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의 반영, 미디어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게 되었습니다.
2. 바르셀로나의 환경이 작가님의 창작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특히, 바르셀로나의 문화적 특색이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궁금합니다.
바르셀로나는 가톨릭을 기반으로 한 종교예술 유산이 풍부하고, 그만큼 그것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의 아나키즘적인 문화가 100년 이상 자리를 잡은 문화의 도시입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스페인의 게이 수도로 유명했고, 아름다운 건축유산이 주위의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여전한 유럽의 제 1 관광도시입니다. 그와 동시에 카탈루냐어가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마드리드의 “표준어”에 저항하는 카운터 컬처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한 도시가 가질 수 있는 이런 다양한 면모가 스스로의 작업에 있어서도 꼭 이전과 같은 작업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중요한 건 그것을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냐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위해 날씨가 좋고 감자튀김이 맛있으면 더 좋구요.
3.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다른 예술가들과의 협업이나 상호작용이 있었나요? 그 경험이 작가님의 작업 방식이나 사고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듣고 싶습니다.
위에 이미 이야기 했지만 또 다른 분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번역가이신 엘리노어 브로만님은 이미 업계에서 오랫동안 경력을 쌓아오신 베테랑이고 행사에 갈때마다 작가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셨어요. 저에게 좋은 레퍼런스도 많이 추천해주셨고요. 같은 시기에 레지던시를 이용한 세 명 중 제가 가장 막내였는데, 좋은 시니어를 보는 경험은 항상 내가 20년 후에 어느정도까지 성장 할 수 있을지 꿈꾸게 해줍니다. 어떤 분야에 있던 전세계적으로 예술가는 돈을 못버는 직업으로 유명하고, 특히 업계의 스타가 탄생하더라도 그 여파가 모든 방면에 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많이 비관하고 업계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버틸 수 있는 힘이 필요한데, 좋은 시니어를 보고 영감을 얻는것도 동기부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엘리노어가 아직도 외국어(카탈루냐어,스페인어)로 말할때, 작가들과 독대할때 떨린다고 얘기해 주셨던게 기억이 나요. 저는 이런 베테랑들을 볼때마다 항상 “30년을 일해도 그렇다고??”라는 생각을 하는데.. 아마 그걸 끊임없이 갈고 닦는 수행이 프로로 가는 길인듯 합니다
4. 바르셀로나에서 언어 장벽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이로 인해 발생한 어려움이나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이전에 프랑스어를 배운적이 있어서 비슷한 어근을 공유하는 말은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문장 구조도 그렇구요. 예를 들어 카탈루냐어의 실례합니다 (si us plau)는 불어의 S’il vous plaît와 많이 비슷합니다. 감사합니다도 gracias(스페인어)가 아니라 merci 라고 하구요. 체류 중간 즈음엔 간단한 주문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화가 안되어서 가장 안타까웠던건 만화 축제에서 부스를 돌 때 였어요. 과반수의 작가님들이 영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 알고 싶은 곳에서는 구글 번역기로 짧은 소통을 했어요. 카탈루냐어를 할 수 있는 상태에서 갔으면 더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번화가의 오래 장사하신 업소나 젊은 점원이 있는 아트샵 같은 경우에는 프랑스 관광객이 너무 많기 때문에 불어는 대강 다 알아들으십니다.
5. 바르셀로나 레지던시의 시설과 지원 시스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한국의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더 나았고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말씀해 주세요.
이번이 저의 첫 레지던시 경험이었기 때문에 비교대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주세요. 하지만 시각예술이나 문학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곁눈질 한 경험으로는, 많은 지자체에서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을 상대로 역량 강화 교육을 시행한다던지 시민과 함께하는 워크샵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바르셀로나의 빌라 요아나는 그런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레지던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준 시청 문화과의 야이자 바로칼님이 작가들의 요구사항을 자주 물어보고 맞는 도시 내 견학 프로그램이나 문화 행사를 추천해줬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한국의 레지던시들에 비해 프로그램이 전무한 시스템이지만, 좋게 말하면 매일 축제와 전시가 있는것이나 다름 없는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의 특성을 담보삼아 자유도를 극대화 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실제로 제가 혼자 원하는 분야의 원하는 행사 위주로 일정을 짤 수 있다는 점에 행복해했습니다. 다만 이런 경우 전적으로 작가의 열의와 코디네이터분의 업무 협력도에 따라 결과가 널뛰기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전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견학시 통역을 위해 따라와주시기까지 한 코디네이터 분을 만났기 때문에 운이 좋았던 편입니다.
6. 레지던시 기간 동안 직면했던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나요? 이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문화 예술계의 후발 주자로서 한국인 예술가가 오리지널리티를 내세우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그 승화 과정을 훌륭하게 해내시는 분들도 있지만 전통을 계승하는데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한국스러움”을 만들어 내는것은 향후 100년동안에도 영원한 과제일 것입니다. 이런 저런 멋있는 작업들이 눈코뜰새 없이 쏟아지는 환경에서 그것을 고민한다는건 꽤 외롭고 머리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 밖에요.. 저같은 경우에는 그럼에도 제 이야기를 외국의 훌륭한 작가가 쓴 수상작들보다 재미있게 읽어줄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과 제 여행기를 나누는게 마음을 다잡는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아무리 멋진 남의 작업이라도 당신의 마음이 동하는 이야기가 아니면 휴짓조각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7. 바르셀로나 레지던시 경험이 향후 작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 같나요? 앞으로 계획 중인 프로젝트나 작품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세요.
더 많은 다양성을 포용하는 쪽으로 캐릭터를 구상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태까지는 글을 충실히 전달하기 위한 미디엄으로 만화를 삼았다면, 이제는 그림을 우선시 해 그리는 것의 즐거움에도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2024년에는 전에 연재해 왔던 개그만화를 출판한 뒤 약간 진지하고 우울한 사랑얘기를 그리려고 했는데, 방향이 약간 바뀌더라도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즐겁게 작업하려고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읽는 사람에게도 작업의 좋은점이 잘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아요.
8. 앞으로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할 다른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특히 바르셀로나 레지던시에 참가할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준비나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언어를 잘하면 좋고, 담당자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면 좋아요. 하지만 항상 웃을 필요는 없어요. 이 점에 대해 시모나와 “영어 페르소나를 갖는것”에 대해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외국어를 사용할때 과하게 긍정적이고 오픈마인드인 사람으로 보이려고 많은 체력을 사용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건 자신의 작업과 경험이니까.. 중심을 잘 잡는게 좋을듯합니다. 너무 많이 알아들어도 열등감이 몰려오니까 좀 덜 알아들어도 나쁘지 않겠다 싶기도 하구요. 저는 박물관에 갈때마다 “그때 조선은..!!!”이라면서 혼자 화내는 사람이 되는 스스로를 막을 수 없었어요. 맥락을 좀 덜 읽어도 괜찮을것 같아요. 뇌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9. 레지던시 기간 중 기억에 남는 특별한 에피소드나 사건이 있다면 공유해 주세요. 이 경험이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CCCB(바르셀로나 동시대 아트 센터)에서 진행중인 전시 Surburbia : Building the American dream 을 관람한 일입니다. 폭넓게는 미국의 중산층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그것이 “신도시”로 대표되는 주택단지의 형성과 “내 집 장만 신화”로 집중되었는지, 그리고 그런 현상이 문화,사회적으로 다른 국가에 어떤 개념을 퍼트렸는지 훑는 전시입니다. 단순히 자료를 잘 모아놓은게 아니라 마지막에 관람자 스스로 갈무리 할 수 있도록 AI를 이용해 만든 교육적인 영상도 포함해놓은게 정말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동산 성공 신화와 신도시/수도권 안착이라는 희망고문에 영원히 시달릴 한국인으로서, 이 시스템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 풍경들의 괴담, 서브컬처로의 다양한 파생은 덤이구요. 24년 9월 8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니, 기회가 되시는 분은 꼭 관람하시길 추천드립니다.
10. 이번 바르셀로나 레지던시가 작가님 개인적으로 어떤 성장을 가져왔나요? 예술가로서의 성장은 물론, 개인적으로 얻은 교훈이나 변화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가장 큰 발견은 언론인이자 풍자만화가인 누리아 폼페이아(1931-2016,바르셀로나)를 알게 된 일입니다. 저는 이미 출판한 작업이나 지금 하고 있는 작업에서는 굳이 프로파간다나 사회적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 않지만, 모든 이야기의 끝을 가리키는 것은 결국 레거시 미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고 있는 만화같은 문화상품보다 훨씬 사람들이 피곤하게 생각하지만 가장 필요하고, 사회에 중요한 가치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을 이미 만화나 그래픽디자인과 결합한 시도를 한 사람이 윗윗세대에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너무 많은 게릴라 미디어단체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봤기 때문에 더 와 닿았던것 같네요. 그리고 이런 사람을 재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한 시도가 여성업계인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번 바르셀로나 만화 축제의 개최일에 맞춰 “페미니스트 만화 계보 회의”를 연 마드리드의 콤플루텐세 대학에서 이미 4월에 그를 기리는 전시를 열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서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몇 여성단체의 아카이브에 그의 작업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교훈이 있다면 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 형태는 이미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생각을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다 연결되네요.
* 알피 리 작가의 바르셀로나 레지던시 결과보고서 링크(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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